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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오늘은 어제보다 더웠다. 해가 강해서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작은 창문을 가리느라 커튼을 쳐놔야 했다. 한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공기까지 후덥지근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창문마다 전부 열어놓은 집무실 안에서 서류만 읽고 펜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베논은 안경을 밀어올리며 깨알같이 적힌 글자를 훑었다. 습관적으로 앞에 놓아둔 머그잔을 들자 무거운 감 없이 훅 올라온다. 움찔 놀라며 잔 안을 살폈다. 곱게 갈린 차의 흔적만 남아있다. 조금씩 홀짝거리다 보니 벌써 다 마셔버렸다. 미리 넣어둔 새로운 티백은 아직 다 우러나오지 않았을 텐데.
들고 있던 잔을 내려두고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막 집어 든 보고서만 읽고 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낮이면 울어대던 새가 보이지 않는다. 가끔 올라와 집무실 내부를 살피듯 둘러보던 고양이도, 도토리를 쥐고 창문 앞에서 쉬어가던 작은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꼭 죽은 건물 같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도 살펴보러 오지 않아서 무너져 내릴 일만 남은 낡은 창고 안에 갇힌 게 아닐까.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그건 뜬금없는 네 착각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베논 있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좁은 틈으로 아우릭의 얼굴이 불쑥 들어온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밝은 미소를 띤 표정. 제 눈꼬리가 단박에 가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냐니, 단장이 제시간에 출근했으면 반갑게 인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제시간이라니, 벌써 시계의 작은 바늘이 1을 가리키고 있는데. 인상을 구기며 쥐고 있던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왔으면 자리에 앉아 일하도록.”
“그건 싫은걸. 어제 많이 했거든. 오늘 또 했다간 쓰러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오늘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라는 대꾸가 목젖을 툭툭 쳤다. 일을 하지 않을 거라면 대체 왜 왔냐는 잔소리는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쳐다보는 거냐고 능청을 떠는 연인은 책상 앞까지 다가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는 하고 왔어? 어제 퇴근은 잘했고?”
“밥은 먹었다. 어제는, 눈 뜨자마자 퇴근했으니 괜찮,”
“약을 먹을 정도면 쉬어야지, 일만 하다가 탈이라도 나면 내가 세울 면이 없어지잖아~”
끝을 보기 전에 툭 끊어진 말허리에 베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표정을 보고는 만족한 것처럼 생글거리는 얼굴 위로 장난기가 스몄다. 그럴 줄 알았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게 바로 다음 행동을 위해 기다린 반응이라는 뜻처럼 보이기도 했다.
넓게 깔린 부드러운 카펫에 굽이 닿을 때마다 뚜걱거리는 구두 소리가 잔잔하다. 모서리를 검지로 훑으며 책상을 돌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뭘 하려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어제 까먹고 간 게 있어서.”
“뭐지? 물건이라면 아무것도,”
“아니, 물건이 아니라.”
다가온 검은 손가락이 안경의 콧대를 잡았다. 피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올려다 보기로 했다. 그의 손에 절반 정도 가려진 시야. 자연스럽게 꽉 잠긴 넥타이와 셔츠로 쳐다보았다. 저 아래 무언가에 갉아먹힌 것처럼 움푹 파인 흉터가.
귀 옆을 훑고 빠져나가는 안경다리. 멀어지는 렌즈를 통해 보이는 풍경이 콩알만 하다. 눈을 감았다 뜨자 그림자가 지도록 가까워진 얼굴. 상체를 숙이고 남은 손으로 볼을 어루만지며 길게 뻗은 엄지로 입술을 간질거린다.
“저 좁은 쇼파 위에서 어찌나 곤하게 자는지, 깨울 수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