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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에 든 건더기는 작게 썰리고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입에서 구르는 맛으로 대충 당근, 고기 이 정도겠거니 예상만 할 수 있을 뿐. 뜨끈하고 묽은 것이 들어가자 열을 내며 펄펄 날뛰던 위벽이 가라앉았다.

 빈속에 풀칠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고 일어서는 제 손에 약 한 병을 꼭 쥐여주던 오든과 다 먹을 때까지 쳐다보던 제이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타박하면서도 병뚜껑을 열었다. 덕분에 덜 아픈 걸지도.

 

 베논은 테이블 위에 빈 약 병을 내려두고, 안경을 쓰려다가 다시 쇼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길게 누웠다. 구두를 신은 발이 팔걸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열린 창문에서 습하고 더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지금 잠을 자면 산더미처림 밀려버릴 일거리가 두려웠지만, 오른쪽 팔을 굽혀 머리 아래 베고 눈을 감았다. 애쓰지 않아도 의식은 순식간에 꿈으로 넘어갔다.

 

 

 

 와본 적 없는 숲속에 실수로 떨어진 물건처럼 누군가 덩그러니 서 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나다. 낮인 것 같은데 주변은 어둡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탓이다.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으며 무언가를 집어 드는 나. 커다란 신발이다. 흙을 밟고 있는 맨발은 온통 까지고 상처투성이다. 발톱은 깨져있고 뒤꿈치는 까져서 피가 나고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꿋꿋하게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은 나는 앞으로 걸어나간다. 목적이 뭐길래 이렇게 급하게 가는 걸까.

 

 머리 위에서 우거진 나뭇잎들이 서걱거린다. 눈앞에서 윙윙거리던 작은 날벌레들이 부는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굵은 가지가 뚝뚝 꺾일 것 같은 불안감에 달리는 속도는 점차 빨라진다. 이윽고 보이는 작은 틈에서 빛이 보였다.

 흩날리는 망토와 삐쭉이며 정돈되지 않은 은빛 정수리, 물에 흠뻑 젖어있는 낫, 먼지 하나 없는 구두.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고 어깨를 두드리기 위해 팔을 뻗었다. 동시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가락을 부딪히고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몸을 반바퀴만 돌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모습. 눈이 주황색으로 번뜩거린다. 웃음기 없는 표정은 서늘하다.

 

 나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모습을 본다. 늘 끝까지 잠겨있던 넥타이가 가슴까지 내려와있다.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에, 흉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깔린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수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퇴근 시간마저 지난 모양이었다.

 ..일났군, 삼십 분만 누워있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스르륵 내려가는 무언가. 자세히 살펴보니 집무실에는 없던 담요였다. 누가 왔다 간 걸까. 단원들이라면 제가 답을 하지 않았으니 함부로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왔다고 해도 잠을 자고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몹쓸 짓을 한 사람처럼 바짝 굳은 채 살살 물러났겠지.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이 최대한 조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당히 선선한 공기가 여름임을 잊게 만들었다.

 눈을 느리게 꿈벅거리던 베논은 흘러내린 담요를 꾹 쥐었다. 제 시선이 닿을 곳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손바닥만 한 종이가 에어컨 날개에 붙어 팔랑거리고 있었다.

 다리를 내리고 쇼파에서 일어섰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높게 뻗으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을 만큼 긴 쪽지였다.

 ‘일어났으면 바로 퇴근할 것.’ 간단하게 적힌 용건. 이름이 따로 쓰여있지는 않지만 정갈한 글씨체는 이런 행동을 한 것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우릭..”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어놨던 창문 또한 닫혀있었다. 잠긴 고리를 풀고 유리를 힘차게 밀자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

 신전 뒤뜰은 어제 새벽보다 고요했다. 힘차게 울던 풀벌레들이 줄어든 건지, 그나마 풀린 피로에 정신이 돌아와서 무의식적으로 필요 없는 소리들을 걸러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시선이 닿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제의 연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둥근 달빛은 인상이 써질 정도로 강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아우릭의 표정과 창백하던 옆모습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반짝이던 눈동자 안에 담고 있던 건 단순히 큼직했던 달뿐이었을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소리쳐 불렀다면 답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꿈에서라도 말해볼 것을.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한가지, 처음 보는 흉터 때문이었다.

 평생 감추고 살 생각인 남의 비밀을 우연찮게 엿보게 된 기분.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묘한 죄책감과 함께 쿵쾅거리며 심장이 뛰었다. 제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큰 지,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들킬까 봐 걱정이 됐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는 곧 몸을 돌려 신전 바깥으로 사라졌고, 제가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증표처럼 젖은 잔디 위로 발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오늘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쪽지를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반으로 접었다. 손바닥보다 작아진 것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테이블 위, 빈 약 병 옆에 놓여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어 천장을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삑, 소리와 함께 꺼지는 에어컨. 이주 전이 마감이었던 서류가 언뜻 스쳐 보였다. 비어있던 네모칸 안에는 단장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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