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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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른다. 푹신하게 밟히는 흙과 옅게 올라오는 풀냄새가 익숙하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콩콩 치다가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렸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어깨에 걸친 망토가 쉼 없이 풀썩거린다.
멀리서 보이는 커다란 나무. 언제나 분홍빛을 잃지 않는 나무가 흔들리며 꽃잎을 떨군다. 여전히 맑은 하늘과 초반에만 간혹 울고 사라지는 새소리. 둥글게 퍼진 그늘 아래,
“...어?”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 다가오면 늘 앉아서 잠이 들어 있는 베논이 있었는데, 어째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번 꿨던 꿈이지만 절대 뒤를 향해 돌아 서지 않았기에 볼 수 없었던 장면들.
아주 멀리까지 이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언덕은 제가 보고 있는 앞만 그러했다. 뒤로 갈수록 물감이 물에 번지는 것처럼 엉망으로 퍼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런 색도 없는 하얀 공간이 등 뒤로 펼쳐져 있다.
갈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 넓은 풀밭을 보았다. 늘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곳이 쓸쓸하고 텅 비어 보인다. 날리는 꽃잎은 가볍게 높은 하늘 위로 올라갔지만, 하얀 공간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부는 방향도 늘 두꺼운 나무를 기준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제 앞에서만 불었다.
“눈치가 빠르다고 들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군.”
베논의 목소리. 새하얀 공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중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서 있는 그는 뚜걱뚜걱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처음 보는 옷을 입은 채로.
“...일어났으면 그 자리에서 기다릴 것이지, 왜 움직여?”
“내가 왜 너를 기다려야 하지? 날 갈구하는 건 너니까 네가 나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우릭.”
“뭐야, 재수 없어 진짜..”
푸른색의 얇은 겉옷은 소매가 없었다. 대신 안에 걸친 것 같은 밝은 회색빛의 옷이 팔을 덮고 있었다. 가슴 바로 아래 묶인 어두운 회색빛의 끈은 길게 늘어져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고, 푸른 겉옷은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거의 다 덮고 있었다.
발목에서 한 뼘 정도 위에서 끝나는 겉옷 밑에는 하얀색 바지가 보였는데, 원래는 펑퍼짐한 넓이인 것을 다리에 딱 맞게 둘둘 말아둔 흔적이 보였다. 앞코는 높게 솟았으면서 바닥은 납작한 신발도 특이했다. 거기다 머리에는 모자까지 쓰고 있다. 특이한 모양의 검은색 모자에 달린 끈은 귀 옆을 타고 길게 내려와 턱 아래 매듭이 묶여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차림인지.
“그렇게 대놓고 상대방을 훑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나?”
“그 웃긴 차림새는 뭐야? 끈이랑 모자는 또 뭔데?”
“...이건 한복이라는 옷이다. 끈이랑 모자가 아니라 술띠와 갓이고.”
그게 뭐야, 입술을 삐죽대며 팔짱을 척 꼈다. 자고 있을 때는 귀여웠는데, 일어나서 말하고 있으니까 은근히 얄미워 보인다.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자꾸만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걷어올리자 시원한 공기가 이마를 때린다. 현실 같은 공기. 손을 뻗자 흩날리는 꽃잎이 손등을 간지르고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사륵 빠져나간다. 현실 같은 간질거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베논은 내밀고 있는 제 손에 본인의 손가락을 얽었다. 늘 끼던 장갑이 없이, 오래전에 마주 잡았던 맨 손바닥의 온기가 느껴진다. 빼내야 하는 건가, 고민을 하는 동안 그는 입을 열었다.
“이 형태를 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길래..”
“무슨 소리야?”
“난 인간의 미련과 후회를 먹으며 사는 요괴다. 주로 내가 담긴 물건을 가진 상대의 꿈에 나타나 미련과 후회를 남긴 장면을 반복하게 만들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외관은 네가 가장 미련을 느끼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다. 이름이 베논인가본데,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쉽겠군.”
저게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서니 약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눈높이. 이 모습, 그리고 이 온기는 지나치게 현실과 같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없다는 점까지도.
“이 형태를 한 인간이 자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꿈에 찾아올 정도로 후회를 하나?”
“후회 안 해.”
“속내를 숨기는 짓도 잘 못하고.”
그는, 그러니까 본인 입으로 베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요괴는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담긴 물건을 손에 쥐자마자 잠을 자고 꿈을 꾸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걸 다 봤으니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아니라니까!”
“고집이 센 건 맞군.”
이를 갈며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가소롭다는 듯한 시선이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렸다. 잡힌 손을 털자 미련 없이 떨어지는 손가락.
베논은 함부로 남을 비웃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 이기지도 못할 것이 우습다’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당사자가 아닌 듯했다. 그럼 뭐야, 나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요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는 모습을 두고 깨울까 말까 하며 매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데, 그것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이 나라까지 오면서 거의 닳아버렸던 힘도 충분히 채워두었지.”
“.....”
“현실에서는 꽤나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던데, 그런 성질치고는 얌전해서 좋았다. 그런 류의 인간들은 대부분 꿈속에서도 행패를 부리기 마련이라 곤란할 때가 많거든.”
그런데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조곤조곤한 말투, 항상 유지하는 단어 사이의 간격, 낮으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목소리, 없는 망토를 넘기기 위해 살짝 움직이는 팔까지. 입은 옷까지 똑같았다면 저를 보는 눈빛이 지금보다 서늘했을지라도 베논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김이 빠졌다. 밥까지 굶어가며 잠을 잤는데 정작 마주 본 건 겉모습만 똑같은 요괴라니. 여태껏 흔들리는 앞머리의 개수까지 다 세어볼 정도로 가까이서 보고 또 봤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거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한 핑계 만들어서 신전에 갔지. 단장이 없는데 찾지도 않는다고 투덜거렸으면 잔소리는 듣더라도 진짜 베논은 봤을 거 아니야.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거슬렸는지, 요괴는 소리 없이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뭐가 불만이지. 말로 해라.”
“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모습이야? 베논이 아니라 요괴라며.”
“내가 이 모습으로 있기를 네 마음이 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데?”
평소 인상을 더 단단하게 보이도록 하는 도톰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선명한 눈매가 가늘게 뜨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딱히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을 때 보이는 얼굴이다.
우리가, 그러니까 베논과 내가 친구이던 시절에는 왜애~ 하고 말꼬리를 늘리며 능청스럽게 말하기를 유도했고, 사랑을 하던 시절에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매달리며 귀엽다고 속삭여 주었다.
“그냥 다른 모습이 되는 건 안돼?”
“인간은 약하다. 특히 바라는 것 앞에서는 더욱 더. 그 사실을 아는데 뭐하러 다른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베논 그 둔탱이보다 더 재수 없어.”
“그런가.”
우물거리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아, 진짜. 대놓고 미간을 구기자 으쓱이는 어깨.
곧 다정하게 ‘아우릭’하고 부르며 손을 내밀 것 같다. 그러면 제 앞에 서 있는 저것이 요괴임을 알면서도 이기지 못하고, 꿈을 꾸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게 되겠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서 엄청나게 티를 냈는데도, 대놓고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둔탱이의 모습으로 영악하게 구는 걸 보자니 짜증이 난다.
요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딱 소리와 함께 얕은 언덕과 커다란 나무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하얀 배경으로 물들어버렸다.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 것이 맞겠지. 넘치는 미련과 후회로 힘을 줬으니, 나도 네가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원하는 것이 있나?”
“웃기네, 정말.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내가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
“거절을 하면 된다.”
“아, 짜증나!”
발을 쾅쾅 굴렸다. 바닥에서는 먼지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
곧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하나쯤은 빌어야지.
혹시 시간을 돌릴 수도 있나. 두 달 정도 전으로 돌아가서, 사랑이 끝나기 전으로 돌아가서, 미련이 남지 않도록 더 표현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도록 더 잘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주 먼 미래로 가버릴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모든 감정은 끝이 있는 법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의 사랑은.
그럼 베논의 사랑은?
“...원하는 거,”
“그래.”
“베논한테 가줘. 그래서 나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착각하게 해줘. 그 둔탱이가 의외로 날카로운 면이 있어서 빨리 알아챌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서 행동해.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쉽게 느끼게 해야 돼.”
요괴는 대답이 없었다. 베논의 눈으로 한참 동안 제 모습을 살피다가 콧김을 픽 뿜었다.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소원이면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진다. 어렴풋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보인다. 눈을 비볐지만 귀에서는 식사를 하셔야 한다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꿈이, 깊었던 잠이 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