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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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멍청하다. 한 번 손에 쥔 것은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집착한다. 그러다 사라져 버리면 미련을 가지고 후회를 하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들이 떨어뜨리는 어두운 감정을 먹고 살았다.
이번에 잡은 인간은 아주 특별했다. 이름이 아우릭이라고 했던가? 뭔 피, 앙스? 특이한 이름이다. 여태껏 살았던 곳에서는 그런 식의 이름을 본 적이 없다. 집도 크고, 입은 옷차림도 좋고, 잠을 자는 장소도 고급스럽게 보였는데. 이미 손에 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떠난 것을 그리워하다니. 지금까지 만난 인간들 중에 어리석음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원래의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 꿈에서 나오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할 기분이 들었을 정도이니 다섯 손가락이라고 해야 맞을까?
요괴는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둥글게 하나만 피어있던 동백이 곧 피를 뿜어낼 것처럼 붉어진 채 세 송이로 변해있다. 이걸 세 개까지 피워낸 인간은 쉽게 보기 힘들다. 더 붙어서 미련과 후회를 빨아먹고 싶지만.
입맛을 다셨다. 외관을 빌려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아우릭에게로 가라. 그리고 나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눈치가 빠르고, 자신을 잘 숨기고, 또 고집이 센 사람이니까 금방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아우릭이라는 인간이 대충 다섯 번째라면 베논이라는 인간은 세 번째 정도 될 것이다.
일주일 만에 다섯 송이를 피운 인간은 오랜만에 봤다. 아마 천 년 만이던가. 천백 년인가? 어찌나 절절하던지 미련을 남게 한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땐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마음까지 느껴봤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지나간 사랑에 집착을 하고 있다니.
그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쓴 다섯 송이의 동백이 아깝지 않게, 다른 인간이 세 송이를 피워주었다. 역시 바다 건너서 듣도 보도 못한 나라까지 온 보람이 있다.
“이 나라에 사는 귀족이라는 인간들은 다 그런가 보군. 사랑 같은 것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옥색 도포의 끝자락이 펄럭였다. 요괴는 잠시 아우릭의 얼굴로 변했다가 이내 선명하던 이목구비를 지워버렸다. 마치 끈끈한 재질의 흰색 천을 두른 것 같은 모습. 손에 쥔 거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가 이내 앞을 향해 머리를 든다.
다시 베논이라는 인간을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아우릭이라는 인간이 계속 자고 있을 때 내내 찾아와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찾아온 것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모습을 봤고, 그의 소원도 들어줬으니 이제 남은 건 그 인간들끼리 알아서 할 것이다. 잘 안된 탓에 또 어두운 감정을 뿜어낸다면 나야 좋지만.
나라 구경도 할 겸, 잠시 떠나서 다른 미련을 찾아봐야지.
세 송이의 동백 정도면 당분간은 가만히 있어도 살 수 있겠지만, 썩지 않는 식량을 미리 구해서 나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