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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辛未)년 경자(庚子)월 무신(戊申)일

 

한 해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두고 온 일들을 생각하라 했을 때 가장 많이 후회가 되는 것은 역시, 그대를 지키지 못함입니다. 가장 잘 했던 일은 역시 그대를 알아 본 일입니다. 그대는 어떨까요. 그대 또한 그대의 삶속에 있는 기쁨과 후회에 과인이 살아 숨 쉬고 있을까요?

 

도성에서 축제가 치러졌습니다. 각 지방에서도 크고 작게 시일을 맞춰 축제가 열렸을 것입니다. 만민 백성들이 즐거이 보낸 축제의 시간을 통하여 위로 받고 새 힘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 축제에는 오랫동안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축제를 열 때와 막을 내릴 때만 자리 했지요. 봄에 있을 과거를 준비하는 것으로 바쁘기도 하고, 내게 다른 이들과 같이 하하 웃으며 즐겁게 있을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축제에 잠깐 얼굴을 보인다고 얼마나 많은 옷을 입고 벗고 또 다시 입기를 반복 했는지 모릅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과인이 깨끗한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멋들어진 공연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축제를 즐기는 줄 아는 것만 같습니다. 과인은 곤룡포를 벗고 바지와 저고리, 도포 위에 쾌자를 입는 것만으로도 만족 했습니다. 그대도 기억하고 있나요? 어명으로 모두 물리고, 그대의 머리칼의 색을 검게 물들여 같은 옷을 입게 했지요.

선한 분홍빛의 쾌자는 그대와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습니다. 그대와 함께 불이 밝은 축제 거리를 거닐었던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그대도 나처럼 느꼈을까요? 사람이 많아 잔뜩 긴장 해 있는 그대를 보면서 웃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괜찮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게야.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의 손을 잡았을 때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는 것이 과인의 가슴을 두드렸다는 걸 알까요. 어둠이 가려진 채로 살아가겠다던, 오롯이 과인만을 위해 생을 살아가겠다던 그대의 얼굴에 웃음빛이 서려 기뻤던 것을 그대가 알까요.

한참 축제 거리를 걸으며 백성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들어가다 도성의 관원들이 준비 해 놓은 임시 천막 아래에 앉았을 때, 그대에게 주었던 것을 기억 하나요? 아름드리나무에서 떨어진 만첩홍매화 가지였습니다. 그것을 그대의 손에 쥐어주며 이 꽃이 언제 태어나는 것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요?

 

폐하의 침전에 두소서.

이 꽃은 네게 더 잘 어울려. 꽃의 의미를 아는가?

알지 못합니다.

고결, 정절, 결백의 의미가 있다 하네.

 

그때 그대가 과인을 만나 두 번째로 자주적으로 과인과 눈을 마주 해 주었음을 기억합니다. 처음은 그대에게 글을 가르치며 소리 내어 읽어 보라 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꽃이 가진 의미를 알려주었을 때였지요. 그대는 당황하면 사람과 눈을 마주하여 저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해도 짐은 알고 있네.

 

그대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감싸 모아 잡으며 말했습니다. 과인은 그대를, 그대의 가문 사람들을 믿는다구요. 그것이 위안이 되었던 것인지 그대의 얼굴이 젖었던 것을 과인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과인의 욕심이 일을 그르쳤던 것일까요. 세상이 그대를 다시 알게 되어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과인이 그대를 숨겨주었다구요. 역모를 꾀한 가문의 아이가 과인의 삶을 어지럽힌다구요.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이리 될 줄 알았더면 차라리 그대를 숨기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황제의 이름 아래 그대를 그림자에서 빛으로 이끌 것을요.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과인의 대신들도 언제나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산 자의 것이 아닌 죽은 목숨이니, 폐하……. 소인은 폐하께서 머무는 이곳에서 눈을 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내 곁에서 눈을 감겠다 하였느냐.

 

그대가 과인에게 그 말을 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아비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 말하는 그대로 인해 마음이 아파서 과인은 입술을 짓씹고 짜디짠 물기를 솎아 삼켰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 거라.

…….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 거라.

 

그때 그대의 옷깃을 붙들고 했던 말은 황제의 명이 아니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은 부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대를 멀리멀리,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보낸 날이 내 마지막 날인 줄 알았건만, 그것도 아니었지요. 사람의 생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리 될 줄 알았더면, 그대를 숨기지 말 걸 그랬습니다. 역모를 꾀한 죄인의 아들을 숨겨주었다는 말을 듣는 것 보다 어찌 그의 아들을 곁에 두시냐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았을지도요.

 

이리 될 줄 알았더면.

이리 될 줄 알았더면.

 

한 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은 아직도 그대를 떠나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선택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일은 일어났으며, 그대는 내 말을 따라 떠났으니 다시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그대를 위한 길을 다시 선택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과인은 그대가 떠나도 그렇게, 그림자에 숨어서 바람처럼 떠나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대가 내게 말하여 줄 줄 알았습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말입니다. 한 나라의 황제 된 자가 이리도 욕심이 많아서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과인은 여전히 괴롭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그대를 잡을 수 없었음에요.

그대 없는 계절을 네 번이나 보냅니다. 그대가 없어도 과인은 여전히 숨을 뱉고 들이마십니다. 이제 또 새로운 계절이 오겠지요. 몇 번의 계절을 더 보내면 그대가 올까요. 내일은, 그 다음은, 그대가 내게 와 줄까요.

 

 

 

신미(辛未)년 신축(辛丑)월 경진(庚辰)일

 

 

추위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 그대의 생활이 염려스럽습니다. 그대는 과인에게 여전히 아무런 소식을 전해 주지 않지만 과인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그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 준비가 계속 됩니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은데 온갖 상소도 끊이질 않습니다. 덕분에 머리를 두드리는 통증은 더욱 거세지기만 합니다. 잠시 잠잠 해 진 줄 알았던 후궁을 들이라는 이야기도 다시 시작 됩니다. 자손을 두어야 한다고요. 과인은 자식을 둘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한 평생을 가슴에 품어 지내온 사람이 있어서 입니다. 스쳐 지나는 연인 줄로만 알았던 마음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자꾸만 부풉니다. 이것을 연심이라 하는 것일지도요.

육촌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이라는데도 시끄러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과인이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이 잔소리를 하려나 봅니다. 그것과 관계없이 조카아이는 착실하게 배워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과인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황제가 될 것입니다. 지혜와 인덕이 넘치는 황제로서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것을 과인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황위를 물려 줄 수 있는 날은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과인이 황위에서 벗어나면 무엇을 할지 생각 해 보았습니다. 과인은 아주 많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더는 이 황궁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습니다. 과인과 함께 거친 세상을 살아 낸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고 싶습니다. 배움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나는 것입니다. 과인은 육촌 조카가 오랫동안 황실에 없다가 돌아 온 이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황제들 중 가장 백성들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황제는 이 아이일지도요.

과인은 스스로 어떤 황제였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실수를 하기도 했고, 고난을 겪기도 했지요. 넘어진 나를 받쳐 일으킨 사람은 스스로였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나, 믿음직한 대신들이나, 백성들의 덕이었지요. 혼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과인은 잘 압니다.

 

산을 본 적이 있느냐.

예.

 

과인이 질문 했을 때 그대가 대답 했지요.

 

산을 올라 본 적은 있느냐.

예.

 

과인의 질문이 짙어질수록 대답을 하지 못하던 그대의 얼굴이 선명합니다. 어쩌다 산을 오르게 된 것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한 것인지 말입니다. 바다에 대해 물을 때도 그대는 마찬가지였고, 숲이나 들에 대해 물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곳에 간적이 있음과 느낌을 설명 해 주긴 했어도 어쩌다 그곳에 가게 된 것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로서 지내며 전국 곳곳을 다녔고, 그림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며 피를 묻혔기 때문이었겠지요.

바로 이렇게 그대가 그림자로 살아 왔던 삶은 어디에나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인은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잃어버리고 이십여 년을 그대가 무엇을 하며 살아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대가 내게 자세한 것들을 말해 주지 못함에 대해 깊이 이해하나 간혹 외롬을 느끼기도 하지요.

과인은 그대가 더는 불러선 안 된다고 한 그대의 이름과 시절은 알면서 그대가 새로이 불러 달라고 한 이름의 시절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과인에게는 마치 흉터 같기만 합니다.

이렇게 다시 또 그대를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 그대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과인에게 또 이름을 가르쳐 줄 날을 기다립니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그대를 부르며 그대가 가보았다는 곳을 떠돌고 싶습니다. 그대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천당 같기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대, 과인을 데려 가 주세요. 그대가 있는 곳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얼마큼 기다리면 그대가 올까요. 얼마큼 기다리면 과인은 이곳을 떠나 그대가 있는 곳에 당도 할 수 있을까요. 멀게만 느껴지는 그대가 애석합니다. 과인을 그리워하세요. 영영히 과인을 떠올리세요. 떠나던 그날에 설움을 삼키는 그대가 과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세요.

 

폐하, 옥체를 온존하소서.

 

그리하면서 보드라운 살결을 열어 숨결을 불어 넣어 준 것을 과인이 기억하는 것처럼 그대도 눈 안에 새기세요. 그것을 충동이었다 말하지 마세요. 그것에 연민이라 이름을 붙이지 마세요. 과인이 그대에게 연정과, 연모와, 연심을 받은 것처럼 그대도 그리 했다고 말 해 주세요. 과인의 손을 잡아주세요. 그대의 마음을 말 해 주세요. 과인을 잊었다고. 과인에 대한 마음도 잊었다고. 부디 그런 말은 거두어주세요.

 

그대의 탄신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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