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신미(辛未)년 정유(丁酉)월 신미(辛未)일
그대가 떠난 지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지나갑니다. 일전엔 추석을 보내었습니다. 나라의 온 백성들이 풍족하게 가족들을 맞이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를 기대합니다.
추석이면 그대의 가문의 사람들과 교류 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선황과 황태자인 제게 인사를 올렸던 것 말입니다. 처음 그대가 황실에 인사를 하러 온 때가 삼 세였던 것 같지요. 처음 궐에 들어 와 인사를 하는 그대를 보며 내 얼마나 그대가 사랑스럽다 여겼는지요. 아직 입궐하지 못 했을 때 친히 그대의 가문에 가서 그대를 보았을 때는 그리 긴장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궐이라는 것이 확실히 인간에게 중압감 따위를 주기는 하나 봅니다. 궐에서 나고 자란 과인 또한 언제나 예와 충과 지의 압박 속에서 살아 왔는데 어린 그대가 그 위압감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가문이 대대로 궐에 머무르며 황제의 곁을 지켰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에 뛰어나 어디에든 있었지요. 가장 많은 이들이 머무르며 거쳐 갔던 곳이 황실경비대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황실경비대의 대장직에 오르려면 현 대장과의 무술시합을 해야 하는데, 같은 가문의 사람이 결투를 신청 해 와도 봐주는 법이 없었던 것은 궐내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렸던 과인 또한 그대들의 귀한 성품과 고고한 자존심을 내건 치열한 싸움이 사흘, 나흘씩 계속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의심 없이 순수한 경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지요. 어찌하여 황제들이 대대로 그대의 가문을 어여삐 여기고 깊이 신뢰하며 사랑 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나라 안팎으로 어떤 분란이 있을 때라도 가정 선봉에 서서 나라를 지키니 귀히 여기지 않을 수가요.
선황께서는 과인에게 황제로서의 예법을 가르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황실 경비대를 굳건히 지키라.
선황께서 승하하시어 국장을 치룬 뒤, 즉위식이 거행 된 것은 과인이 아직 14세였을 때로, 그때는 무엇이 무언지 알지 못할 때였지요. 과인이 약하여 과인은 황실 경비대를 굳건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즉시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가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은밀한 술수를 써 그대의 가문의 이들이 황제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라 알렸고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백성들은 들고 일어났습니다.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과인은 그대의 가문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믿기만 하라는 말은 선황께서 하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거칠어지는 폭동에 휘말릴 때 선대 황제 때부터 직위를 감당하고 있는 황실경비대의 대장이 침전에 들었습니다. 네. 그대의 아버지 입니다. 지혜를 내어 보이라는 말에 대장은 이렇게 말했지요.
소인의 생을 거두시고 평화와 안정을 찾으시옵소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그래선 아니 된다고 말했지만 무엇이 아니 된다는 것인지는 명확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과인의 실수였지요. 과인이 힘이 약하여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대의 아버지는 과인이 쏘아 올린 활에 심장을 내어주었습니다. 감투를 뒤집어 써 얼굴을 가린 채 손발이 묶여 서 있는 가주, 당신의 아버지를 과인이 죽인 것입니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더면 과인은 끝까지 스스로를 탓할 뿐 몸을 찢으며 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 밤 그대의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가옥이 전부 불타올랐다는 것을 압니다. 흩어져 사는 이들 중 가문의 씨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하나의 생명까지도 원인 불명의 불치병으로 스러졌지요. 과인은 그때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아직 어렸을 그대를 말입니다. 그대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기에 다시 그대를 만나기까지 살아오는 모든 순간들이 죄책감이었습니다. 괴로움이었습니다. 그 일이 지금의 과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왜 이 말을 소상히 적어 두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떠나간 그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음에, 과인이 그대만이 아는 곳에 서신을 접어 둔 것이 사라졌음에도 그대가 이 서신에 답을 하지 않음에 이유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렸던 그때나,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이나 과인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과인은 여전히 약합니다.
삼 세의 어린 아이였던 그대가 이십삼 세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때도 그대는 지금처럼 내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요. 그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름을 부를 땐 몸을 돌렸고 내일 또 오라 말했을 땐 가만히 어둠에 가려 고개를 끄덕였지요.
내일도 또 오거라.
내일도 또 오거라.
어명이니라.
그대는 과인의 어명에 따랐습니다. 언제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 과인을 찾아 왔습니다. 그림자에 숨어 나타나 과인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잠깐 깜빡인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그 시간들이 꿈 같았지요. 내일이면 그대가 다시 오지 않을까봐, 그대로 사라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며 늦게까지 서책을 넘기고 나랏일을 굽어 살피는 것은 대신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하니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던 거겠지요.
그대의 이름을 부르며 과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대는 내게 새로운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요. 이름을 아뢸 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합니다.
짐이 그동안 다른 이름을 불렀구나.
과인은 그대가 알려 준 새 이름을 부르면서 또 말했지요.
내일도 또 오거라.
과인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대를 어명으로 속박 했습니다.
황제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나 짐의 앞에 드러났다고 하여 스스로 생을 거두려 하지 말라. 끝까지 살아남아 짐의 곁을 지키고 짐이 가는 곳은 어디든 동행하라. 이것은 황제의 명이니 그대가 속한 부대의 명보다 더 귀한 것이 될 게야.
그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대를 붙잡고 싶어 황실의 비단에 그대가 좋아 할 만한 것을 싸서 주었고, 과인 또한 그대를 지키리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 그대의 검에 황실의 징표가 되는 장신구를 매단 것이었습니다. 그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그대 스스로를 지킬 활과 검. 모든 것이 과인의 욕심이었음을 그대는 알면서도 중히 여기며 몸에 지니고 다녀 준 것을 어떤 마음으로도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대가 이름을 바꾸고 어둠에 가려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가문이 멸하여 지던 날 자신도 죽었다는 뜻이었을 테지요. 누군가 빛을 잃은 그대를 데려 가 황실의 가장 어두운 무리 속에 집어넣은 것이라면 과인은 그대를 자유롭게 풀어주며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분명 스스로 새 옷을 입어 궐에 들어온 것 일 테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과인에게 모습이 들킨 그 순간 스스로 자결 했을 테니까요. 그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러기 전에 과인이 그대를 알아보아 다행입니다.
언젠가 그대에게 다시 또, 내 마음을 말할 수 있을 날이 올까요. 가만히, 잔잔히 그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과인의 원은 이제 그것뿐입니다. 내 바랄 것은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신미(辛未)년 무술(戊戌)월 무신(戊申)일
참을 수가 없이 머리에 깊은 통증을 이고 사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한 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머리가 아프다 하였더니, 내의원은 약재를 지어주면서 시름을 푸시라하였습니다. 시름을 푼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대에게 서신을 보내는 이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좋으니 과인에게 시름은 그대를 생각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산짐승이 굴을 파둔 자리로 돌아갑니다. 씨앗은 흙 속에 숨어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봄철에 심어 여름에 땀을 흘리고 가을에 추수한 것들을 곡식 창고에 저장 해 둡니다. 얼어붙기 시작한 땅이 줄 수 있는 것은 없기에 모두가 겨우내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선조들의 지혜와 지금 이 나라에 맞는 이치를 깨달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걸어갑니다. 자연이란 크고 신비하여 과인의 아픔 따위와는 상관없다는 듯 돌아갑니다.
그대가 있는 곳도 추위가 성큼 다가 왔나요? 그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할 수 있는 말이 많지가 않습니다. 과인은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무엇을 먹고 있을지 가늠할 다름입니다.
글은 아직도 배우고 있나요? 무예는 녹슬지 않았겠지요. 주변에 사람은 있나요? 그대가 좋아했던 다과는 여전히 좋아하나요? 언젠가 그대에게 비단에 싸서 주었던 다과들을 기억합니다. 가뭄이 지속 되고 있던 때라 저녁 수라 이후 올라오지 않을 야다소반과를 대신 해 다과가 조금 곁들어져 그대를 생각 해 담아 둔 것이었습니다. 유밀과, 떡, 조란 등으로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받기를 망설이던 얼굴이 아직도 두 눈에 선명합니다.
받아 열어보거라.
비단을 열어 다식을 확인하고 웃음 짓던 그대의 얼굴이 오래 전 보았던 아이의 얼굴과 닮아 있어 벅차오르던 것을, 그대가 알았을까요. 어렸던 그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기억 해 두고 있었던 것을 그대는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대가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느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대는 다 괜찮습니다.
내 그대에게는 그대가 속한 부대의 명보다 과인이 한 명이 더 귀하리라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황실 그림자 부대에 관하여서는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랬기에 과인은 그대가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왔을지, 주변에 좋은 사람을 두었을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황실의 그림자 부대는 황제와 말을 섞지 않는다지요. 황제의 명에 반할지라도 그것이 황제의 생을 위협한다면 처치한다지요. 그대들의 자유 의지로 황제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지요. 그대는 왜 그곳에 있었나요? 과인은 그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그대의 아비의 생을 거두었는데. 왜 그대는 거기에 있었나요?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과인이 알지 못하는 어떠함이 그대의 안에서 생을 밝히고 있었겠지요.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대를 살게 만드는 어떤 원동력이 그대에게 있음을 과인은 압니다. 그렇기에 과인은 그대가 과인을 위하여 생을 마감 하지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그대의 죽음이 과인을 모든 위협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과인의 명을 기억하세요. 과인의 원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진흙탕 같은 곳에서도 그대와 함께 하는 것이 과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과인에게서 배운 글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부디 답하여 주기를 간청합니다. 그대가 글을 읽고 쓰는 기쁨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밤마다 그대에게 글을 가르치고 서책을 읽어 줄 때마다 그대의 얼굴이 우리가 벗 삼은 달빛보다 빛나고 있었음을 기억 합니다. 그림자로서의 훈련에 시간을 바치느라 잠시 잊었던 문예가 그대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 되었는지 과인은 압니다. 이제 그대는 과인이 가르친 것들을 잊지 않을 것도 압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갈아 놓은 먹에 붓을 적시는 것을 보면서, 내 말을 따라 눈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을 보면서 과인은 언젠가 이렇게 그대와 글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대.
그대.
혹, 혹여,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잊었다면 부디 과인의 글씨 모양을 기억하여 점 하나를 찍어 보내 주시기를 원합니다. 과인에게 있는 원은 이제 그것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