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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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릭은 잘 익은 채소가 쿡쿡 찍힌 포크를 던졌다. 공중을 날은 식기가 수십 명이 나란히 누워도 될 만큼 넓은 식탁 한가운데로 텅텅 굴러간다. 채소에 묻어있는 소스가 흰 테이블보 위로 여러 선을 그었지만 돌아오는 타박은 없었다.
열 개 정도 놓인 의자는 제가 앉은 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있었다. 벽을 따라 서 있는 두세 명의 하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지금 당장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춘다고 해도 그 행동을 예의 없다고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전자를 들고 있던 하인은 조용히 다가와 빈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쪼르르륵 소리가 길고 오래 울렸다.
기분 나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상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 짝사랑을 할 때도, 고백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할 때도, 사귈 때도, 심지어 일 때문에 오래 만나지 못했을 때도 베논이 나오는 꿈은 꾼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것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침실을 나서기 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둥근 거울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어쩐지 어제보다 꽃의 붉은색이 더 진해진 것 같다.
“이거 말이야.”
“예.”
“원래 어디다 뒀어?”
“어제 입고 계신 제복의 주머니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아우릭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주 머무시는 서재의 바구니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래?”
하인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향해 눈을 떨군다. 그리고 3초 뒤에 예,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높낮이가 변하지 않는 목소리.
있을 리가 없는 자리에서 자는 제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놓여져 있던 거울. 하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로 사람을 몰아붙이거나 타박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피비앙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주어진 일을 정확하게 처리했다. 마치 세세한 동작까지 모두 입력된 기계처럼.
손바닥으로 거울을 집어 들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넓게 깔린 카펫 덕분에 귀를 긁어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후식은,”
“됐으니까 옷이나 준비해줄래?”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딪히기 다섯 발자국 전에 활짝 열리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린 하인 두 명은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로 고개만 살짝 숙였다.
신은 신발을 벅벅 끌며 계단으로 향했다. 무언가 자꾸만 찜찜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인, 그 노인이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고른 이유, 두지 않은 자리에 놓여져 있던 물건, 동양의 거울. 어쩐지 좀 더 붉어진 것 같은 이 꽃도 마음에 걸린다.
왜 베논이 나오는 꿈을 꾼 걸까.
나는 그를 찾고 있었다. 거기 있다는 걸 아니까 당장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급하게 굴었고, 자는 얼굴을 마주하며 안도를 했다. 볼 정도는 콕 찌르고 장난이었다며 능청을 떨 수 있는데, 그랬다가는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손을 거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어날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옆에 붙어 있었고,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그를 좋아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혹시 무의식적으로 헤어진 전 연인을 떠올리고 있었나? 아니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베논의 이름이라도 들었나? 아닌데,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흐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만지려고 손바닥을 폈다. 동시에 들고 있던 거울이 굴러떨어졌다. 탕탕거리며 복도 끝자락까지 굴러간 것이 벽을 쾅 치고 제자리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췄다. 근처에 서 있던 하인은 놀란 기색도 없이 허리를 굽혀 물건을 주었고, 정확하고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제게 향했다.
어제 산 건데 깨졌겠네. 인상을 쓰며 하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기분이 나쁜 이유는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머릿속 때문이지, 그가 나와서 싫은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선하기도 했고, 약간 설레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본 얼굴이었다. 헤어진 이후부터는 일을 하지 않고 도망 다녀도 저를 찾지 않는 부단장에게 심통을 부리려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것이 벌써 일주일째. 그럼 우리가 헤어진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는 말인가.
“...허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고 싶었나, 나도 모르게 보고 싶어 했나. 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럼 현실에서는?
어느새 다가온 하인은 거울을 내밀었다. 아우릭은 잠시 붉은 꽃을 내려다보았다. 동백이라고 했던가. 촘촘히 엮인 실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깨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렇게 굴러갔는데, 안 깨졌다고?”
“예.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버튼을 꾹 눌렀다. 원 가운데가 넓게 벌어지고 모습을 다르게 비추는 거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 담긴 제 얼굴에는 흠집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말 깨지지 않았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뒤를 차례대로 살폈다. 멀쩡했다. 쉼 없이 쓸고 닦는 카펫 위를 굴러서 그런지 먼지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하던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다시 베논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검은 눈동자가 보고 싶다.
“가디언 제복은 됐으니까 잠옷으로 준비해줘. 그리고 연락 한 통만 해줄래?”
몇 분 뒤, 침실의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전부 막혀서, 불을 켜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다. 편안한 잠옷과 방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라벤더 향. 말끔하게 정돈된 이불을 들추고,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푹신한 감촉에 웃으며 손짓을 하자 다가온 하인이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곁에 놔준다.
“수면제는 한동안 드시지 않더니 어쩐 일이십니까.”
“어어,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자 남자는 각진 가방을 꺼내고 그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 안에서 새끼손톱의 절반만 한 하얀 알갱이들이 달각달각 굴러다닌다.
대대로 피비앙스 가문의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 가문에서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 이전 피비앙스 가주에게 똑 부러지고 머리가 좋아서 후손들을 잘 돌볼 인재라고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
이름에 ‘피비앙스’가 들어가는 이들은 너도 나도 그를 찾았다. 실제로 진료를 잘 하기도 하지만, 아마 이전 가주의 칭찬을 받았다는 소문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긴, 온 세상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꽉 막히고 깐깐하며 답답한 이전 가주라는 양반 입에서 다른 가문의 아이를 칭찬이 나왔다는 건 그 아이가 걸어갈 길에는 돈이 깔려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얼마 전부터 그는 진료를 봐주는 사람의 수를 줄였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현 가주와 직속 가족들뿐이었다. 제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많은 친척들이, 특히 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몇 명이 다 들으라는 듯 수군거렸지만, 조용히 하라는 현 가주의 말 한 마디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드시는 법은 아시겠지만,”
“하루에 한 알. 그 이상으로 먹으면 몸에 큰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확률은 낮지만 별의 힘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한 알을 먹고도 잠이 오지 않으면 연락을 해라~ 이거지? 알고 있어.”
“여기 있습니다. 정량을 맞춰서 드신다면 다음 주까지 드실 수 있습니다.”
“에에, 고작 그 정도만 주는 거야?”
투덜거리며 병뚜껑을 열고 손바닥 위로 털었다. 후드둑 쏟아지는 약을 하나만 남긴 채 병 안으로 다시 넣었다. 의사는 미지근한 물과 함께 수면제를 삼키는 제 모습을 보다가 가방을 챙기고, 걸치고 있는 정장 자켓이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겼다. 방 이곳저곳에 서 있던 하인들은 하나씩 인사를 하며 나갔고, 의사 또한 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자연스럽게 꺼지는 조명. 저게 무슨 시스템이라고 했더라,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 자세히 귀에 담지 않아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늘 그런 식으로 상대의 말에 신경을 쏟지 않는 점이 지친다고 헤어짐을 요구하던 전 연인을 꿈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