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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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새파란 하늘. 간혹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 연둣빛 풀을 한 방향으로 쓸며 지나가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여기는 어디일까.
오르고 있는 언덕은 얕았다. 오랜 시간 걸어도 숨이 차지 않을 것 같은 경사. 나는 지금 산책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마음 한구석이 급했고,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맞겠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풍성한 나뭇잎과 분홍색 꽃이 만들어 낸 그늘 아래 앉아있는 누군가. 굵은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두 다리는 급하게 뛰어갔다. 찾고 있는 게 저 사람이었는지,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도 저렇게 자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고, 얼른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크루세이더 복장을 하고 있네. 여기는.. 신전 근처인가? 신전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노력해도 수도 내에 이런 동산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해를 가렸던 구름이 흘러갔다. 어렴풋하게 형태만 보였던 그림자에 해가 들자 잠든 이의 얼굴이 보였다.
“..베논?”
눈썹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살살 흔들렸다. 곱게 뻗은 속눈썹과 날 선 콧날, 꾹 다문 입술. 바람이 불 때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이 사르륵 날려 베논의 하얀 제복과 검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망설이다가 그의 곁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풀이 자라는 흙이 축축하게 묻을 줄 알았는데,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앉은 것처럼 포근하다.
깊게 잠든 탓인지,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부단장으로서 작성한 서류 속 본인의 성격을 대변하는 글씨체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이렇게 자는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여전히 좋아 보이는 피부를 쓸어보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피비앙스 저택의 서재 구석에 처박힌 로맨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이지, 실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에는 끝이 있고, 사랑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했고, 사귀었고, 헤어졌다.
덮어주려고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한 깃이 볼에 닿는다. 주렁주렁 달린 단장 배지가 서로 부딪히며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대가 잠에서 깨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 알면서도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못이 박힌 것처럼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희귀한 장면이라 그런가.
베논은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해가 뜨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샤워를 한 다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차를 타서 출근한다, 일하다가 퇴근해서 잠에 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반복되는 패턴. 아주 일찍 일어나거나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지 않는 이상은 자는 얼굴을 보는 일이란 극히 드물었다.
“......”
잘도 잔다. 그렇게 보고 싶었을 때는 절대 보지 못했던 모습인데.
나는 이 남자를 언제부터 좋아했더라. 아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였을 것이다. 아직 파티가 신기하던 시절.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이 즐거웠던 나이.
제 얼굴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준 집사는 오른쪽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야니크에서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고, 자주 볼 사이이니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 순간 파티장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어른들이 서로의 배우자나 약혼자를 끌어안고 춤을 추기 좋으라며 깔아주는 곡이었다. 지루하고 느린 템포.
베논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랑을 하는 것인지 의심이 되신다면 하루에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시간을 세어보세요.’
계단 난간을 마른 걸레로 닦던 하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뒤돌아서서 발꿈치를 한껏 들어봐야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아이가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웃기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진지했다. 왜냐면 이상하게 자꾸만 그 아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만나고 싶었다. 야니크 가문의 그 아이가.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해주고 싶었고, 말해주길 바랐다. 귀찮다면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자주 하는 일은 무엇이고, 나중에 크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가장 동경하는 건 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으면 하는지. 새까만 눈이 참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방으로 돌아가면서 베논을 생각하는 시간을 세었다. 작은 손가락이 접히고 펴지기를 반복했지만 몇 시간을 생각하는 게 많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순간부터, 그러니까 파티장에서 처음으로 저 눈꺼풀 아래 가려진 새까만 시선을 마주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그 눈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베논. 자?”
낮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히 고른 숨소리뿐이었다.
눈을 떴다. 살짝 열린 창문에 흔들리는 커튼을 따라 들어왔다 가려지기를 반복하는 햇빛. 창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째액거리며 날카롭게 울더니 푸드득 날갯짓을 한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서 팔을 타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이불. 그 작은 움직임에 바깥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고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를 건넨다.
대답하지 않은 채 늘어뜨렸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두었던 옷은 사라져 있었고, 호기심에 사왔던 작은 거울은 침대 맞은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