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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辛未)년 갑오(甲午)월 무오(戊午)일

 

 

땅이 메마르는 날들이 지속 됩니다. 칠 일에 한 번 미시부터 신시까지 황제의 예법을 차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벌써 달이 두 번 바뀌도록 비가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이 덕이 없어 하늘이 벌하시는 것이라며 오늘도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피를 보아야 한다구요. 과인의 피가 이 땅에 흩뿌려지는 것으로 비가 내리고 백성들의 근심을 해결 할 수 있다면 과인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리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겠지요. 과인의 목숨 값은 모두를 살릴 수 있을 만한 값어치를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대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때도 정사가 어지러웠던 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때도 과인은 금관을 짊어지고 몇 번씩 절을 하였고 정전을 피하여 뙤약볕 아래에서 정무를 보았습니다. 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발버둥 쳐도 비는 내리지 않았지요. 그때 그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 합니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의 배고픔을 어루만지소서.

 

곳간을 열어 각 마을 곳곳으로 쌀을 보내 거라. 그리 말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허나 그대가 수도에서부터 멀고 먼 나라의 끝까지 발걸음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루어 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대의 노고로 인하여 관아의 관원들이 부패하여 자신의 뱃속만 채우는 것을 면할 수 있었지요. 나흘이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그대가 함께 해 주지 않았으면 이루지 못했을 일입니다.

지금, 그대가 없는 곳에서 과인은 홀로 있습니다.

그대가 과인의 그림자에 숨어 다시 과인을 찾아 주기를 기다립니다.

 

 

 

신미(辛未)년 을미(乙未)월 병술(丙戌)일

 

 

꺾이지 않을 것만 같던 무더위가 지나갑니다. 입추가 지나니 계절이 변하는 것이 느껴져 자연의 신비함을 느낍니다. 초록이 무성 했던 산들이 옷을 갈아입고서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도 이 바람이 닿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요즈음은 관자놀이에 누군가 날카로운 것을 대고 두드리는 듯한 통증이 지속 됩니다. 내의원을 찾는 순간마다 소란이 일어날 터이니 참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과인의 작은 헛기침에도 시름을 삼가시란 말들이 연이어지니 이젠 숨기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통증에 시달릴 때면 황제의 칭호를 짊어지는 자 또한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대와, 수많은 대신들과, 황제를 있게 하는 백성들과 똑같은 존재인 것이지요. 용이니 무엇이니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궐내에 있는 과인보다 염려 되는 것은 그대입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그대를 되짚습니다.

과인이 황태자였고 그대가 아직 아장아장 걷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마음에 차곡차곡 기쁨이 차오릅니다. 순하고 맑은 웃음을 지을 줄 알았던 그대는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내게 예를 차려 인사를 했지요. 그대의 미소가 내게 영양분이 되어 모든 시름이 흩어지는 것만 같은 기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대를 보내고 싶지 않아 하루의 모든 일을 미뤄두고 밤이 오기 전까지 함께 했던 기억이 떠나갑니다.

그대를 잃고 난 뒤로 다시 만났을 때는 그대가 어둠에 가려져 있을 때 뿐이었지요. 그것이 내게 아픔이었어도 그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것이 나에게는 가슴이 부푸는 즐거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대와 함께 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과 함께 기침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그대의 아비가 그대를 위하여 약재를 구하러 다녔던 것도 기억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예에 특출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이르게 말을 하며 몸을 조절 했던 것도 같습니다. 고질적인 병 따위가 그대의 재능을 빼앗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요.

자주 아팠던 그대가 혼자되었던 시간들이 내게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그대를 조금만 더 빨리 찾아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대 없이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대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평생의 죗값으로 여기며 살아가려 했건만. 그대를 다시 만난 시간이 내게는 천금 같기만 했는데. 과인은 다시 또 그대를 멀리 보내고 맙니다.

잘 계시는지요. 그대도 과인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대가 과인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과인을 잊겠다고 한다면 과인은 어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다만, 과인은 그대의 얼굴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과인은 언제나 그대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면 그대가 까마득히 떠오르지 않는 때가 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과인에게 있습니다. 이 불안을 그대도 안다면, 과인을 보러 와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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