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entalism
Collaboration
*
웬일로 가주가 아우릭을 불렀다. 아우릭도 적잖이 놀라서, 예복을 멀끔하게 갖추고 큼큼 소리를 내고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노크를 했다.
"소자, 왔습니다."
죽어라 아버지란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실제로 높임말만 했지 정작 아버지란 말을 담지 않은 지 꽤나 오래되어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방 안을 들어가니 봄임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을 생각나게 하는 서늘한 공기가 아우릭을 반겼다.
아우릭은 가주가 앉아있는 앞에 앉아 곧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최근 사이가 좋다고 하더구나."
"...들으셨습니까."
당연히 들었으리란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 인간이 또 무슨 얘길 할려고 나를 불렀을까.
아까까지 자칭 형님과 함께 저잣거리 가서 신나게 놀고 와서 술 한잔 마시며 잠들면 딱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아무튼 인생에 도움이 안...
"내가 왜 그 아이를 이 집안에 들였는지 아느냐."
"바다와도 같은 깊은 마음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안다 하더라도 수면이 심해가 될 수는 없음을 잘 압니다."
그냥 나는 네 마음 따위 1도 모르겠고 빨리 보내달란 말이었다.
가주가 소리내어 웃자 아우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웃긴단 말인가.
아, 다 된 밥에 잿더미 뿌려서 재밌는 건가.
"그럼, 곧 알게 되겠구나."
*
"근심이라도 있는 것이냐?"
원래도 애주가였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 10일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신 사람 같았다.
달도 밝고, 날씨도 선선하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한데 계속 성 내는 아우릭을 보며 그는 아우릭이 마시던 술병을 붙잡았다.
"뭡니까아.."
"이만 됐다."
"싫어어! 더 마실껍니다아아-"
"아버지라도 만난 것이냐."
"...돗자리 까셔도 되겠습니다 형니임~"
붉어진 얼굴이 유난히 씁쓸해 보였다. 아우릭은 술병을 달라며 계속 팔로 쫄랐고, 그의 '형님'은 팔로 막으며 저지했다.
이내 포기한 듯 축 늘어진 아우릭은 안주로 놔 둔 마른 멸치를 하나 질겅질겅 씹다가 한숨 푹 쉬고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왜..형님ㅇ..."
푹.
허여멀건 마늘 같은 머리가 그대로 그릇에 쳐박혔다.
*
내가 너무 안일했었다.
바보같이, 그저 기우일 것이라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몇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나는 가문을 모르는가.
비가 억수 같이 내려 국화 꽃잎마저 다 저버린, 잿빛 하늘 아래. 아우릭은 인상을 한껏 구겼다. 자신의 왼팔에서 흐르는 붉고 질척한 것이 아니라, 앞에 서 있는, 자신이 가장 의지했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왜…?”
“....”
다친 건 난데.
배신 당한 것도 나고.
그런데.
왜 당신 표정은 마치....
“형님이..정녕 저의 가문을 파하기 위해 이런..짓을 저지른 것이 맞으십니까.”
“이제 와서 거짓을 고할 필요가 있겠느냐.”
거짓이라고 해 주지. 그냥, 억울하게 누명이 씌워진 것이다 연기라도 해 주시지.
왼손에 힘이 빠졌으나 반대로 오른손은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너무 세게 꽉 쥐어서 핏줄이 터질 듯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주께서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형님..이 어찌하여 이 빌어먹을 가문에 들어오게 된 것 인지를..요.”
칼을 서서히 들었다. 손잡이에 달린 황색 실이 흔들거렸다.
“정답을 찾았느냐.”
반역의 낌새가 보이니 처치하라는 가주의 명을 받고 달밤에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급히 옮긴 흔적이 보여 다시 돌아오니, 이미 마당은 난장판이었고 그 가운데 꼿꼿하게 서 있는 자가 보였다.
아우릭이 말에서 내리자 그자는 두건을 벗었다.
익숙한 얼굴이 아우릭을 맞이했다.
“..저는 형님의 아우이기 이전에 가문의 이어가야 하는 몸입니다.”
속이 뒤집어 질 것만 같았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베어라 소리치는 이성과 베지 말라 붙잡는 감정이 서로 얽혀 눈 앞이 아지랑이처럼 핑 돌았다.
겨우 마음을 부여잡고 검을 세게 꽉 쥐었다.
“검을 들거라.”
“말하지 않아도 들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