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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은 자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 책을 붙들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도 너무 늦게 가는 것은 민폐가 되리라는 걸 알기에 베논은 좀 더 서둘렀다. 이윽고 베논이 다다른 곳은 양반이 살기엔 다소 작고 초라한 집이었다. 

아니 오히려 양반들이 살 법한 집은 절대 아니었다.

“베논…?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베논이 걸음을 재촉하며 달려왔던 이유이자 이 허름한 집의 주인인 로건이 베논을 맞이해 주었다.

“자네는 왜 밖에 있었나.”

베논은 전혀 티나지 않았지만 놀란 눈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오랫동안 베논과 함께 왔던 로건의 눈에는 미세한 표정 변화 마저도 알아 챌 수 있었다.

“밤공기가 좋아 잠시 나와 있었네. 그리고,”

로건은 이렇게 말한 뒤 살짝 웃어 보였다.

“자네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로건의 웃음은 여태껏 긴장되어 있던 베논의 기운을 느슨하게 해주었다. 그 영향인지 베논도 로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띄었다.

*

방문이 닫히자 밖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모두 멀게 느껴졌다. 로건은 밖에 보이는 조용한 풍경을 감상하며 은은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감상했다. 그러는 동안 베논이 로건의 잔도 채워주며 먼저 술을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로건은 베논의 배려에 미소를 짓곤 잔을 들었다.

“고맙네.”

로건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치며 천천히 잔을 비웠다. 베논은 로건보다 조금 더 빨리 비운 뒤 곧바로 이어서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는 베논이 걱정이 되었던 로건이 입을 열었다.

“자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로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베논은 잠시 정신이 깨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잔을 내려 두었다. 로건은 계속해서 걱정하는 눈치였으나 이에 대해 일일이 캐묻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왔던 서로 간의 일종의 신뢰였다. 말하지 않아도 언젠간 상대방이 말해 줄 것이라는 암묵적 신뢰였던 것이다.

“잊을 뻔했군.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네.”

“선물…이라니…?”

어리둥절하며 있는 로건 앞에 베논은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자네가 갖고 싶어했던 책이네.”

베논에게서 책을 받아 든 로건의 눈은 책의 제목을 확인하자 눈을 반짝였다.

“이건 이번에 나온 ‘산다화’가 아닌가!”

로건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베논도 따라 슬그머니 미소를 띄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반기는 것은 로건의 변치 않는 모습이었다. 새 책을 가져다 주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도 베논의 낙이었다. 그랬기에 매번 책을 구해 로건에게 안겨 주곤 했다.

“자네가 좋아하니 다행이군.”

베논은 손에서 만지작거리던 술 잔을 들며 말했다.

“고맙네. 근데…나는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어째 미안해지네.”

로건이 머쓱하게 웃으며 베논을 바라봤다. 베논은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턱을 괴며 대답했다.

“난 자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네. 자네 웃는 얼굴이면 충분해.”

베논의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잘 들리지 않는 밖의 사람들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베논의 시선에 로건은 어쩐지 민망해져 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쩐지 가슴이 두근대서 하마타면 ‘사모한다’라는 말이 툭 하고 나갈 뻔했다. 

베논은 아마도 모르고 있는 감정이기에 더욱 더 조심해야 했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곱게 봐줄 시선도 없을 뿐 더러 오랜 시간 쌓아 온 벗을 한순간의 충동으로 잃고 싶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로건이었다. 로건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을 꺼냈으나 시선은 여전히 베논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흠흠..자네 혹시 산다화의 꽃말을 알고 있나?”

“꽃말이라니…뜬금없군.”

“하하, 그래도 한 번 맞춰 보게.”

“흠…청렴과 결백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도 맞지만 다른 뜻도 있네.”

“다른 뜻? 도 다른 뜻이 있었나.”

“‘그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로건의 말에 베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고백일리는 없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로건은 자신을 그저 어린 시절부터 봐온 마음이 잘 맞는 좋은 벗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심 같은 것은 그저 내 착각일 뿐인가.’

베논은 선뜻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로건은 자신의 행동이 베논을 당황케 했음을 눈치챘다. 속으로 혼자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꾸짖으며 먼저 상황 수습에 나섰다.

“아무래도 내가 자넬 놀라게 한 것 같네.”

“로건…”

“아하하, 내가 장난이 심했나. 자네는 가끔 너무 진지해서 탈이네.”

“…”

“이제 늦었으니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네.”

“…그렇게 하지.”

로건은 베논보다 한 걸음 더 서둘러서 나왔다. 베논이 짓던 복잡미묘한 표정에 괜스레 아려졌다. 왠지 그 표정이 자신의 마음을 거부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밖에서 드리는 풀벌레 소리가 로건에게 유독 구슬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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